유보된 승리, 끝나지 않는 투쟁 - 코오롱 정투위
'결국 이래야 하나'
37세의 남성이 주머니 속 커터칼에 손을 대본다. 그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주머니 속에 손을 넣은 채로 칼날을 밀어올린다. 적당하게. 너무 짧으면 실패하고 너무 길어도 부러지고 말 것이다.
'단번에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루를 쥔 손마디엔 도무지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손은 땀에 젖어오고 눈 앞이 온통 하얗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늘하고 아린 통증이 전신을 타고 눈 언저리로 흐른다. 온통 근육과 신경이 뻣뻣하게 곤두선다.
가족들의 얼굴 위, 고압송전탑에 매달려있는 동료들도 겹쳐진다. 누가 저리도 서럽게 우나. 사방이 고요하다. 손바닥을 적시는 끈적함과 울음소리만 먹먹하게 전해져온다.
올해 3월 27일 서울 성북동 코오롱그룹 회장 저택에서 손목을 가른 이 사람은 노조위원장 최일배(37)였다.
정리해고자들, 노조 집행부로 돌아오다
우리 사회에선 권력자로 낙인찍힌 대공장 정규직노조위원장. 최씨는 위원장이면서 해고자였다. 조합원들은 해고자인 그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최씨 만이 아니었다. 작년 7월에 있었던 노조집행부 선거에서는 6명의 임원에 모두 정리해고자가 당선되는 이변이 벌어졌다.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현장을 짓누르는 가운데, 조합원들은 공장 출입조차 자유롭지 않은 정리해고자들을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당신들 때문에 우리가 사는기라. 작업장은 숨도 못 쉰다"
"반장들이 '너희가 1차가 될 수 있다'고 협박을 하고 다닌다. 싸우고 있는 사람은 당신들 뿐이다"
2인 1조 투표, 휴대폰 카메라로 기표용지 찍어오기 등 사측의 지배개입이 극심했지만, 결과는 정리해고자들의 승리였고 동시에 조합원의 승리였다.
모든 게 너무 순조로왔지만. 그게 화근이었을까. 예상치 못한 승리는 예상치 못한 반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해고되고 그렇게 기뻤던 건 그날 하루 뿐이었죠. 술먹고 엉엉 울었어요. 복직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조합원들에게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게.."(해고자 이상진 씨)
유보된 승리. 결사투쟁
당선 일주일 후. 선거관리위원장 조씨는 "간단히 미팅이나 하자"고 선관위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장에 가보니 용역들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조씨는 선거 무효를 선언했고, 대기하고 있던 용역들이 그를 데리고 사라졌다.
승리는 유보됐다. 2004년 말 시작된 정리해고의 과정에서 노사합의를 어겼던 사측은, 이제 구조조정에 걸림돌이 될 선거결과마저 뒤집은 것이다.
집행부에 당선되고도 2년째 공장 문밖을 돌고 있는 최일배 위원장과 코오롱 정투위(정리해고투쟁위원회)는, 아닌 말로 죽는 것 빼고 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올해 3월엔 '결사(決死)투쟁'을 시작했다. 전기철(38) 김만수(39) 문종호(35) 씨는 고압송전탑 위로 기어올라갔다. 머리 위로는, 조금만 몸을 뻗으면 이것도 저것도 다 날아가버릴, 15만 4천볼트의 전류를 이기지 못하는 고압선들이 '웅웅' 진동소리를 냈다.
이들이 요구한 것은 단지 면담이었다. 순진하게도 이틀이면 될 줄로 알았다. 그렇지만 20일이 넘도록 사측은, 지난 2년간처럼,감감무소식이었다. 최일배 위원장은 가슴이 타들어갔다. 생의 가장자리에서, 농성자들이 가진 거라곤 널빤지 한 장 뿐이었다.
"위원장, 우린 절대 안내려갈라요" "힘들어도 좀 참으소. 열심히 싸우면 안 될 게 어딨소?"
20일에서 하루가 더 지났다. '마지막 남은 방법'을 피하지 않겠다고 최씨는 결심했다.
만수씨, 침낭을 뒤집어 쓰고 울다
눈을 떠보니 병상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어둠 속에 꼬박 하루를 누워있었다. 손목의 상처보다, 긴 투쟁의 피로함보다, 알 수 없는 자괴감이 그를 짓눌렀다.
그는 결국 공개되지 못하고, 바지주머니 속에 그대로 있는 유서를 구겨버렸다. 소식은 농성장에도 전달됐다.
위원장보다 한 살이 많은 만수씨는, 기철씨와 종호씨 몰래 침낭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표시안내면서. 한 두 번씩 눈물을 흘렸죠. 힘들고 안타깝고 해결국면도 안보이고 그러니까. 돈 있는 자에겐 형식으로 보일지 모르나 우리에겐 뼈에 사무치는 눈물과 피랍니다" (김만수 씨)
민주노총 탈퇴
그가 구치소에 있을 때, 조합원들이 거부했던 김홍렬 후보가 위원장이 됐다. 선거공고조차 없었다. 코오롱은 재작년 선거에서 노조 파괴를 위해 김홍렬 후보를 지원하고 선관위원을 매수한 혐의로 형사처벌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법은 멀었고 노동자의 편이 아니었다.
지난 21일. 코오롱노조는 정해진 수순처럼 민주노총을 탈퇴했다. 어떠한 정당성도 없었지만, 언론은 코오롱노조를 두둔하며 '강성노동운동에 대한 외면'이라고 짖어댔다.
코오롱 정투위는 극심한 패배감에 시달렸다. 차츰 소박한 웃음도 사라졌다. 49명의 해고자 가운데 5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손목 봉합수술 하루만에 구속됐던 최일배 위원장은, 지난 9월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이탈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미안하다. 미안해서. 내가 먼저 연락할라고 했는데.."
"니가 뭐가 미안하노. 내가 미안하지"
"형 나올 때까지라도 기다려야하는데.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장모님도 그러고.."
"다 이해한다. 그래도 연락하고"
"1라운드는 졌다"
몇몇 사람들이 떠났고, 정투위는 다시 2라운드를 준비하고 있다. 최일배 위원장은 아직 외롭지 않은 장수다.
9월 26일에 정투위 전체회의가 열렸다. 솔직한 얘기들이 오갔다. 그리고 정투위는 흩어지지 말자고 결론내렸다. '이제까지는 졌다. 지금부터는 이기는 싸움을 만들어보자'
요즘 최일배 위원장은 각 사업장을 돌며 연대를 요청하고 새로운 재정사업도 찾고 있다. 지난 주 서울에서 만난 최일배 위원장은 이런 말을 했다.
"연대를 다니면서 깜짝깜짝 놀랍니다. 천명이상 사업장 대부분이 마치 2년전의 코오롱과 너무 흡사했습니다. 현장의 실태라든가 분위기가 구조조정 전의 코오롱과 너무 닮아 있습니다. 나도 이래 투쟁하게 될 줄은 참말로 몰랐습니다. 지금은 비정규직의 위기가 아니고 사실은 정규직 노동조합의 존폐로까지 밀리는 상황까지 와버렸습니다. 그걸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모습도 코오롱과 닮아있습니다"
[민중의소리에서 옮겨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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