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상식 이하 공공부문 정책을 보면서
[기고]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군주나 신하의 공명심(功名心)이다
15세기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D. Erasmus)는 10대 후반에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렸을 정도로 뛰어난 인문학자였다. 그가 쓴 우신예찬(愚神禮讚)은 당시 가톨릭 성직자들의 소모적인 논쟁과 지적 허영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이 책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은 신학자나 철학자의 논쟁, 군주나 신하의 공명심, 전쟁 등”이라고 썼다.
예나 지금이나 남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출세할 수 있는 인간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은 공명심(功名心)을 비난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근래 우리나라 관료들의 경쟁적인 실적내기 행태를 보면 '아무리 출세도 좋지만 저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에 측은하기조차 하다.
임금피크 병행 정년연장이 도덕적 해이?
그럼 임금피크 없이 정년연장한 공무원은?
최근 한국전력 노사가 합의한 정년연장에 대해 정부(기획재정부)가 제동을 걸고 나서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정년연장 문제를 한번 거슬러 가 보자. 지금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속도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정부는 지난 2006년 ‘저출산·고령화 연석회의’를 발족했고, 노동부는 그해 7월 ‘고령자 고용촉진 기본계획’에서 “2010년까지 60세 이상 고용의무화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미 제정돼 있던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의 “사업주가 근로자의 정년을 정하는 경우에는 그 정년이 60세 이상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19조)는 조항을 근거로 지방청을 통해 사업장에 수차례 ‘정년 60세 연장’을 권고하는 공문을 보냈다. 같은 내용의 문서를 통한 권고는 2006년부터 정권이 바뀐 2008년까지도 계속됐다.
2007년 대통령 선거시 이명박 후보는 한국노총과의 정책연대에 합의하면서 “고령화 사회에 대비하여 정년을 60세 이상으로 의무화하는 ‘연령차별 금지 및 정년보장에 관한 법률’을 2008년 중 제정할 의향이 있다”고 서면으로 약속했다.
정부는 2008년 6월13일 국가공무원법을 개정해 현재 6급 이하 57세(5급 이상은 60세)인 공무원의 정년을 단계적으로 연장해 2013년부터 60세가 되도록 했다. 이때 내세운 명분은 “공무원의 정년을 계급별로 차등하는 것이 헌법상 평등원칙에 맞지 않는 데다 고령화 사회에 대비해 정년연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정부의 이런 정책에 따라 일부 공기업에서도 ‘공무원에 준하여 정년을 60세로 일원화’ 하기로 노사가 합의했다. 그러나 정부가 “임금피크제 등 비용절감 방안이 같이 강구돼야 한다” 는 이유로 반대해 아직까지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노총이 지난해 한나라당과 정책협의회를 통해 이 문제를 논의할 때도 ‘공무원과 동일하게 조건 없는 정년연장’을 주장하는 한국노총과 정부의 이런 의견이 부딪혔다.
금년 초 한국전력 노사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서 정년을 60세로 연장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이제 정부(기재부)는 청년실업 문제를 거론하며 ‘일괄적인 정년연장은 안 된다’ 고 말을 바꾸고 있다. 심지어는 ‘도덕적 해이’ 운운하며 국민감정을 자극하려 든다.
한번 물어보자. 그렇게 청년실업을 걱정하는 정부가 공기업에 우수한 인재가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초임을 삭감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기업 인력을 10~15%나 칼질을 해 댔는가. 공무원 정년을 일괄적으로 올리는 것은 “고령화 사회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고 공기업 정년 일원화는 “도덕적 해이”인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도 정도껏 해야 웃고 말지.
개인별 성과연봉제, 속셈은 '노조 무력화'
정부(기재부)는 지난해부터 계속해서 공기업에 ‘개인별 성과연봉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공기업이 무슨 보험회사나 자동차 판매회사인가. 공기업의 흑자·적자가 순전히 정부의 정책과 정치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에서 개인별 성과 산출은 무슨 수로 할 것이며, 개별 노사가 단체교섭을 통해 결정해야 할 임금체계를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하고 강요한다는 것 자체가 불법이라는 걸 모르는가. 사업특수성도 다르고 회사의 설립 역사도 각기 다르며, 업무강도와 성격도 천차만별인 300여 공기업의 임금을 모두 똑같은 체계로 강제하겠다는 것 자체가 ‘공산당’ 발상 이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다.
이것은 호봉제를 폐지해 자연증가 인건비부담을 없애고, 개인별 연봉계약을 통해 정부와 사용자의 관리통제를 강화하겠다는 속셈이다. 또 초임삭감으로 인해 이원화된 임금구조를 통합해 두고두고 말썽거리가 될 소지를 없애겠다는 것이며, 결국은 임금교섭권을 배제해 노동조합 존립 자체를 부정하겠다는 것이다.
스스로 포기한 중립성, 감사원의 부끄러운 자화상
감사원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공기업에 대한 특별감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명목은 ‘공기업 선진화 추진실태 점검’ 이다. 엄격한 정치적 중립이 법률로 보장돼 있는 감사원이 권력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기획감사를 한다거나, 다른 부처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듣는 것은 참 민망한 일이다.
참고로 감사원이 지난해 국회에 낸 자료에 의하면 감사원의 인건비 증가율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평균 약 6.5%였다. 특히 금융위기로 모든 공공부문에 인건비 동결과 임금삭감을 강제한 2009년에도 무려 8.5% 증가했다. 또한 공공부문에 10~15%의 인력감축을 강제한 2008년부터 2009년 사이에 감사원 인력은 912명에서 955명으로 4.7% 증원됐다.
직원들 애경사에 회사가 최소한의 예를 표하는 경조금도 다 없애라 하고, 퇴직금을 덜 주기 위해 성과상여금 절반만을 평균임금에 포함시키라는 상식 이하의 억지가 정말 ‘선진화의 길’ 인가. 어떻게든 ‘큰집 높은 분’ 눈에 띄기 위해 그동안 정부 스스로가 해 오던 일도 부정하는, 그 영혼 없는 몸부림이 측은하기까지 하다. 단언하건데 당신들의 출세를 위한 지나친 공명심이 정부에 대한 불신과 관료에 대한 국민의 분노로 응축돼 결국에는 자신도 망치고 나라도 망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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